2019년 말부터 두 달 동안 사회 전반에 걸쳐 국내 트렌드를 공부했습니다. 서점에서부터 회사 워크숍, 강연과 컨퍼런스, 그리고 인터넷 자료에서 곧 다가올, 아니 이미 다가온 2020년에 대한 인사이트를 수집했습니다.
문득 트렌드의 근원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사회·문화적 특이성으로 국내에만 나타나는 트렌드도 있지만, 세계적인 흐름에 영향을 받아 탄생하는 트렌드도 많은데, 그 시작은 어디일까요?
지난달 방송된 tvN 'Shift'에서는 전 세계 트렌드를 이끌어 나가는 곳을 뉴욕이라 정의했습니다. Shift 4화는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의 저자인 김난도 교수가 프레젠터로서 '뉴욕에서 미리 만나는 올해의 소비 트렌드'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김난도 교수는 조승연 작가, 그리고 가수 에릭남과 함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하는 뉴욕 밀레니얼을 만납니다. 인터뷰이와 최근의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이 내용을 우리나라 사회와 엮어 보는 것이 프로그램의 구성입니다.
뉴욕의 밀레니얼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불안하지 않냐고요? 내가 재밌으면 되죠.
뉴욕에 기반을 두고 여행 영상을 만드는 유튜버 존 바는 10평 남짓의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침대, 책상, 그리고 컴퓨터 만으로도 방이 꽉 차 보입니다. 그의 집은 '예술가의 동네', 혹은 '보헤미안의 천국'으로 불리는 뉴욕 맨해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습니다.
존은 관리비까지 350만 원을 월세로 내고 있습니다. 프리랜서라 회사가 뉴욕에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그는 뉴욕 한복판을 고집합니다.
미국의 대형 부동산 사이트 '렌트카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곳은 뉴욕 맨해튼입니다. 월평균 4190달러(한화로 약 500만 원)로, 2위인 브루클린과는 1000달러 이상 차이 납니다.*
* 참고 기사: 미국 내 월세 최고 비싼 곳은 뉴욕 맨해튼 (2019.7.20, 초이스 경제)
"저에게는 넓고 편한 집보다 재미나 경험이 더 중요해요. 여긴 유동 인구가 그 어느 곳보다 많기에 흥미로운 상점과 음식점이 자주 생겼다 사라져요. 에너지가 충만한 이곳을 떠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죠."
경험 소비와 욜로(YOLO) 성향이 극대화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밌는 건, 이렇게 미래보다는 당장을 고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점입니다.
혹시 공유경제에 대한 이야기 아니냐고요? 틀린 답은 아닙니다.
집도, 사무실도 함께 쓰자.
집세가 이렇게 높다 보니 어느 정도 현실에 타협하는 이들은 주방이나 욕실만 함께 쓰는 공유 주택을 이용합니다. 작년 뉴욕 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40% 이상의 성인 뉴요커가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고 할 정도니까요.* 또한, 경영 사정은 좋지 않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위워크가 뉴욕에 있습니다.
* 참고 기사: Here's how much money NYC roommates will save you (2019.8.12, New York Post)
그러나 공유경제는 <2020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렌드>의 '셰어 투게더(Share Together)'나 <디지털 트렌드 2020>의 '공간을 재정의하는 공유경제' 등 국내 트렌드 도서에서 언급한 내용과도 겹치는, 새롭지 않은 개념입니다. 심지어 <트렌드 코리아>는 2018 버전에 '공유 경제로의 진화'라는 제목으로 해당 내용을 싣기도 했죠.
불타오르네, 뉴욕의 밀레니얼!
Shift에서 소개한 뉴욕의 새로운 트렌드는 '파이어(FIRE) 운동'이었습니다. 여기서 'FIRE'은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약어입니다. 재정적인 독립 상태가 되어 일찍 은퇴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최근 뉴욕의 밀레니얼을 중심으로 20대부터 수입의 최대 80%를 매월 저축하며 은퇴 자금을 마련하고, 30대에 조기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 참고 기사: FIRE: The movement to live frugally and retire decades early (2018.11.3, BBC)
김난도 교수가 만난 파이어족은 두 명입니다. 다니던 의대를 그만두고 태국 음식점을 개업한 잭 시티는 5년 뒤 은퇴를 꿈꿉니다. 그는 음식점 운영 외에도 블로그 광고와 부동산 투자를 통해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방 한 칸짜리 4평 집입니다. 잭의 사계절 옷은 옷장 하나에 모두 수납 가능합니다.
"젊고 건강할 때 집이나 돈 등의 물질적인 소유물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언제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위해 5년만 고생할 생각이에요."
또 다른 파이어족은 이 트렌드의 선구자인 존 그랜트입니다. 그는 5년간 100만 달러를 저축하고 30세에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온라인 마케팅 회사에 다니며 다방면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며 부수입을 얻었다고 합니다. 짧은 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었던 비결로 그는 "수입의 80% 이상을 어딘가에 투자하여 돈이 돈을 벌게 한 것"이라 말했습니다.
한 명은 초절약하는 삶을, 다른 한 명은 최대한으로 투자하는 삶을 살며 시간을 보냈지만 두 명의 공통점은 30대에 은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한 명은 이미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
노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성을 지향하는 것.
파이어 운동을 마주한 기성세대는 이런 우려를 표합니다.
"한 우물을 20~30년 파면서 커리어를 쌓다 보면 지금과 또 다른 눈높이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텐데. 너무 좁은 시야로 놀 생각만 하는 게 아닌가?"
이에 존은 이렇게 답합니다.
"파이어 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일을 그만두는 게 아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을 찾는 기회를 쥘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은퇴 후에도 팟캐스트 진행과 강연 기획 등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게 글쓰기와 지식 공유라는 걸 깨닫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Shift의 출연진 세 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요? 힘들게 사는 부모를 보며 자라왔기에, 열심히 살아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두 눈으로 보았기에, 먼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매일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밀레니얼 중엔 존 바와 같은 욜로족도 있고, 재테크나 사이드 잡을 통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는 알뜰족도 많습니다. 그런데 파이어 운동은 아직인 것 같습니다. 밀레니얼 세대의 국경은 참 희미하기에, 전 세계 트렌드를 이끄는 뉴욕을 따라 가까운 미래에 우리나라도 파이어 운동의 불씨에 기름을 붓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케팅업에 종사하는 분들이라면 미리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잭 시티를 타깃으로 할지, 다양한 곳에 최대한으로 투자하는 잭 그랜트 같은 소비자를 타깃으로 할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