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화요일, 서울 SAC 아트홀에서 '대한민국 콘텐츠산업의 2019년을 결산하고 2020년을 전망하는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 주최: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체육관광부
SAC 아트홀은 본래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객석 단차가 크고 의자는 영화관처럼 푹신했습니다. 덕분에 트인 시야로 3시간 동안 불편함 없이 세미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는 두 세션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부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하 한콘진) 정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콘텐츠산업의 2019년 결산과 2020년 전망'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발표 내용*은 한콘진 블로그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 2019 콘텐츠 매출125조! 플랫폼전쟁, 소셜무브먼트, 비소유콘텐츠… 2020 전망은?
2부는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업에 종사하는 실무자들이 국내 콘텐츠산업의 흐름에 대해 논의하는 라운드테이블이었습니다. 본 글은 라운드테이블의 주요 화두를 중심으로 각 산업의 이야기를 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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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재 스브스뉴스 PD: 디지털 콘텐츠는 재미만이 살 길
이은재 PD는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의 연출과 출연을 담당합니다. '연반인(반은 연예인, 반은 일반인) 재재'로 더 유명한 그는 이날도 트레이드마크인 새빨간 머리와 유쾌한 입담을 선보였습니다.
"디지털 콘텐츠, 특히 유튜브는 흐름이 정말 빨라요. 저는 '오늘내일' 하는 영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오전오후' 하죠. 그만큼 기획과 제작이 정신없이 지나가요. 10분 길이의 영상 하나에 2주 이상의 시간은 쏟지 않아요."
<문명특급>의 인기 요인을 묻자 그는 '내용의 재미에만 집중한 것'이라 답했습니다.
"요즘의 유튜브 사용자들은 취향이 양극화되어 있어요. 양 끝에는 슬라임 플레잉 같은 단순한 소재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촘촘히 짜인 콘텐츠가 있어요. 레거시 미디어는 중도를 걸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지만 디지털 매체는 그렇지 않죠. 저희는 후자의 카테고리에서 재미를 추구해요."
그는 대표적 예로 <문명특급> 17화를 소개했습니다. '공포의 애교녀'라는 타이틀로 10년 넘게 고통받은 이지혜 배우와 함께한 콘텐츠였습니다. '디지털 장례식'이라는 이름으로 잊힐 권리를 조명한 이 영상은 10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문명특급> 팀은 제작 환경도 자유로운 편입니다. 각 잡힌 회의보다 일상적인 수다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20대 인턴들의 의견도 적극 반영합니다.
* JTBC 임석봉 방송정책팀장: 국내 OTT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방송사에게 2019년은 생존을 위해 변할 수밖에 없는 한 해였습니다." 임석봉 팀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존재는 넷플릭스였습니다. 넷플릭스의 2019년 글로벌 매출은 약 22조입니다.* 한콘진에 따르면 국내 방송 사업의 매출은 약 20조였습니다. 여기에는 지상파는 물론 종편과 케이블 방송사, 그리고 홈쇼핑 채널의 수익까지 포함됩니다.
* 자료 출처: macrotrends (2018년 10월부터 2019년 9월까지 집계)
이에 국내 방송업계는 '전략적 동맹'을 택했습니다. SK브로드밴드의 '옥수수'와 지상파 3사 콘텐츠연합의 '푹'을 합친 OTT* '웨이브(wavve)'는 지난 9월 18일에 출범했습니다. CJ ENM의 스튜디오드래곤과 JTBC의 제이콘텐트리가 합작하여 만든 신규 OTT 플랫폼은 내년 1분기에 공개됩니다.**
* Over The Top,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TV 서비스
** 참고 기사: 뭉치는 토종 OTT… CJ ENM-JTBC 합작법인 설립 예고 (파이낸셜뉴스, 2019.9.17)
"넷플릭스의 강세는 계속될 테고, 내년에는 디즈니 플러스까지 혼란에 가세할 것입니다. 11월에 론칭한 디즈니 플러스는 이틀 만에 1000만 가입자를 돌파했습니다. 2020년에는 국내에도 안정적인 OTT가 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 이영한 롯데엔터테인먼트 투자제작팀장: 돌파구가 필요한 혼란의 영화계
넷플릭스는 영화계에도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이영한 팀장은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해온 장르도 위기라고 말했습니다.
"스릴러는 소위 '기본은 하는' 장르였는데 요새는 아니에요. 스릴러 영화마저 영화관이 아닌 온라인 플랫폼에서 소비하게 된 것이죠. 원래 우리나라에서 개봉하는 영화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어요. 화려한 할리우드 영화, 인디 할리우드 영화, 그리고 한국 영화로요. 요즘은 인디 외국 영화는 거의 없고, 양극화가 심해졌죠."
그는 국내외 정상급 영화감독들이 넷플릭스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 제작자들이 사회적인 규제나 이슈를 신경 쓰는 것에 지쳐 자꾸 넷플릭스나 드라마로 탈주합니다. OTT용 영화 제작도 고려해봤지만, 스케일이 아주 크지 않은 이상 투자자를 구하기 어려워요.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를 많이 확보하는 게 저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에는 <어벤저스>처럼 화려한 시리즈물, 큰 화면과 좋은 음향 시스템이 중요한 뮤지컬 영화, 그리고 톱 배우들이 등장하는 한국 영화들이 개봉할 예정입니다. 온라인 플랫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안병도 카카오게임즈 대외협력팀장: 지속적 성장에는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
한콘진에 따르면 2019년 대한민국 게임산업의 매출은 14.7조 원이었습니다. 5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8.3%로, 영화(3.4%)나 방송(5.2) 업계와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안병도 팀장은 게임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은 '대중의 게임에 대한 인식 변화'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은 북유럽 3개국 순방에 게임산업 관계자들과 함께했습니다.* 넷마블은 BTS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실사형 시네마틱 게임 'BTS 월드'를 선보였습니다. 게임 유저는 물론 일반 대중도 모바일 게임을 점점 친근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 참고 기사: 북유럽 순방 `톱3 게임사`는 왜 갔을까 (매일경제, 2019.6.14)
올해 가장 주목받은 게임은 <달빛조각사>와 <리니지2M>입니다. 둘의 공통점은 충성심 높은 유저가 많이 확보되었다는 것이죠. 한편, 2020년에도 게임산업이 순항하려면 규제 완화가 필요합니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아직도 게임 제작과 유통에 많은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2019년 7월, 게임산업 진흥에 대한 법률이 일부 개정되었습니다. 정부는 게임업체가 아이디어와 기술만으로도 새로운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자금 투자와 인큐베이팅 사업을 시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게임산업이 한류의 큰 힘이 되려면 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확대돼야 할 것입니다.
* 참고 기사: 게임산업, 다시 한번 비상을 꿈꾸자 (전자신문, 2019.11.19)
* 김유창 한국웹툰산업협회장: 누가 웹툰계의 넷플릭스가 될 것인가
"우리 업계는 '웹툰 영역의 넷플릭스' 자리를 두고 경쟁이 치열합니다. 네이버웹툰과 카카오페이지가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죠."
김유창 협회장은 대한민국 웹툰 콘텐츠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네이버웹툰의 올해 매출액은 약 3000억 원이었습니다. 이는 전체 만화 산업의 25%를 차지하는 금액입니다. 카카오페이지는 5년 만에 매출이 100배 증가했습니다.(2013년 21억 원, 2019년 2200억 원)*
* 자료 출처: 세계 100여 개국에서 '1위' 네이버 웹툰...미래가치 무한대 (뉴스핌, 2019.10.24), 카카오페이지 매출 100배 뛰게 한 수익모델은(한국경제, 2018.12.25)
앞서 논의한 다른 분야와 달리 웹툰업계는 'OTT 전쟁'이 반갑습니다. 지난 9월에 열린 네이버웹툰의 서비스 밋업에서 김준구 대표는 "네이버웹툰은 매력적인 오리지널 IP(지식재산권)를 다수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회사들과 공생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글로벌 웹툰 시장을 점령한 후 영상 미디어 시장까지 개척할 계획입니다.
* 참고 기사: 네이버 "OTT 전쟁, 웹툰에는 큰 기회" (아이뉴스24, 2019.9.24)
* 현민아 아트앤테크놀로지센터 연구원: 잠재력이 큰 미래 콘텐츠
'실감콘텐츠'를 아시나요? 오감을 자극해 몰입도를 향상시키는 기술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그리고 혼합현실(MR) 등이 모두 실감콘텐츠입니다.
정부는 지난 10월, 실감콘텐츠산업 활성화를 위해 2023년까지 1조 3천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당장 내년부터 국방 훈련이나 재난안전 분야와 같은 공공부문에 실감콘텐츠를 적용할 계획입니다.*
* 참고 기사: 2023년까지 5G 실감콘텐츠산업에 1조 3천억 원 투자 (연합뉴스, 2019.10.07)
현민아 연구원은 "아직 실감콘텐츠가 상용화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실감콘텐츠는 아직 안정적인 소비 플랫폼이 없습니다.
"올해 VR 테마파크와 아케이드가 몇 곳에 생기긴 했어요.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VR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무선 디바이스가 개발되기도 했죠. 그렇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무선 디바이스는 PC에 연결해서 이용하는 디바이스보다 그래픽카드의 사양이 좋지 않습니다. 하드웨어 제조사들도 함께 고군분투하는 중이죠."
그럼에도 실감콘텐츠는 미래가 기대되는, 잠재력이 큰 산업입니다. VR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튜버도 등장했고, LG유플러스는 AR 콘텐츠를 360도 회전하면서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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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콘텐츠산업 세미나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또 각 분야의 콘텐츠 제작자의 입을 통해서 2019년과 2020년의 트렌드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실무자가 말하는 2019년은 콘텐츠와 기술의 결합이 두드러지는 한 해였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등 기존의 미디어에게는 가혹했고,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웹툰이나 유튜브에게는 기회였습니다. 이은재 PD의 말처럼 '오전오후'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재빠르게 새로움을 흡수하고, 이를 콘텐츠로 녹여내는 임기응변 능력이 필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년 이맘때는 '국내 콘텐츠산업이 전체적으로 호황을 누렸다'라는 결산을 볼 수 있길 바라며, 리뷰를 마칩니다.